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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 출국장 모습(자료사진)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모습(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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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님, 저 내일 비행기 타요."
"어떻게 해... 아쉽지 않아요?"
"그냥... 제 능력이 안되나 봐요. 그냥 몇 년 아이들 키우면서 공부 더 하면 나중에 왔을 때는 다를까요? 어머니요? 쉬시지 못하게 생겼어요. 이제 여동생네 아이들 봐주신대요. 이게 대한민국이에요. 이게 현실이구요."


그녀가 대한민국을 떠났다. 떠나기 하루 전인 지난 금요일에야 겨우 소식을 듣게 되어 전화 통화만 했다.

그녀는 2016년 가을 서울여성회 신입회원 환영회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뒤풀이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는 그날 "이런 자리는 처음이에요"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집이 멀어 계속 시계를 쳐다보긴 했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우연히 그녀 옆에 앉게 되어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특이한 인사였다. 여성회 행사에서 만난 여성들은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명함이 있는 여성들이 많지 않고 그런 관계에 있지 않기에 명함이 있어도 잘 내밀지 않는데, 그녀는 나에게 명함을 주었다.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회사에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두 아들의 엄마인 여성이 대기업, 그것도 유명건설회사 팀장이라니. 이 여성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얘기를 듣기도 전에 이건 거의 생존기겠군 싶었다. 

그녀는 조용조용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회사생활을 해왔는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울 4년제 공과대학에 입학한 그녀. 친정 부모님, 특히 어머님이 여자라도 하고 싶은 공부든 뭐든 다 하라고 하는 진취적인 분이라 여성이지만 공대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같은 과에 여학생이 5명도 안 되었지만 여자라서 못한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과 모임에서 열심히 술도 먹고 센 척하면서 대학 생활을 했다. 가끔 이상한 이야기하는 교수랑 남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큰 시련 없이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 자기가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더 열심히, 더 열심히.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여자라서' 소리가 죽을 만큼 듣기 싫었던 그녀

학교 성적도 좋았던 그녀의 이력서를 받아주는 건설회사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지원 자격에 반드시 군필이어야 한다는 조항이 문제였다. 다른 동기들보다 치열하게 공부했고 내내 우수한 성적이었는데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고, 혹은 못 갔다고 그녀의 이력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녀는 그대로 질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군대를 다녀오기로 했다. 군대를 자원해서 입대했고 남성들의 의무복역 기간만큼 복역을 했다. 제대를 하고 나서 군대에 안 다녀왔다고 자신을 떨어뜨린 그 회사에 이력서를 냈고, 보란 듯이 당당히 입사를 했다. 입사 후에는 어땠을까?

'여자라서' 소리가 죽을 만큼 듣기 싫었던 그녀는 정수기 물통도 번쩍번쩍 들었고, 복사기 고장 나도 혼자 진땀을 내며 처리했으며, 술자리에서도 끝까지 남았고, 주말 출장이랑 평일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건설 현장 소장님들과는 어떻게 일했을까. 나는 차마 거기까지 묻질 못했다.

그 사이 그녀는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어떻게 가능했냐고? 자신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배우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인생을 산 게 너무도 후회되는 친정엄마가 두 아들을 다 키우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친정엄마의 60대를 바쳐 팀장까지 갈 수 있었다. 울며불며 직장을 떠나는 여성 동료들도 지켜보았고, 그때마다 여직원은 이래서 회사에 도움이 안 된다는 뒷말에 자신은 더 이를 앙다물었으리라.

내가 그녀를 만난 2016년 가을, 그 기업은 국회의 국감 자리에서도 언급이 되었다. 회사 경영진의 투자실패를 직원의 정리해고로 해결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 정리해고 대상자였다. 

"참 이상하죠? 언론에서 우리 회사가 정리해고를 진행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그 다음 날 회사에 가서 만난 여자 동료와 아마 우리가 1순위 대상자일 거라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말이죠. 회사가 제일 먼저 나 같은 여성부터 정리해고할 것 같았거든요. 아무리 근무 평가가 좋아도 그럴 거 같더라구요.

아니나 다를까. 제일 먼저 면담이 잡혔고, 상사는 제 얼굴을 차마 못 본 채로 이해해달라고만 했어요. 저보다 늦게 들어왔고 제가 일을 다 가르쳐서 키운 남자 후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말이에요. 암묵적으로 진행돼서 회사가 언론에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발적인지 아닌지 저도 헷갈려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더니 얼마 못 가서 회사를 정리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해 겨울은 2016년 촛불항쟁이 뜨거웠던 시기였다. 난생처음 이런 집회에 나와본다는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위원장님, 우리 회사에도 노동조합이 있었으면 제가 안 잘릴 수 있었을까요? 제가 진작 노동조합이나 이런 문제에 관심을 더 두고 나섰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저도 눈치만 본 건 아닌가 반성이 돼요."

두 아이를 데리고 추운 겨우내 촛불항쟁에 참여했던 그녀는 그다음 해가 되자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좀 더 집에 있을까 싶었는데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 다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고, 어머니도 다시 일하라고 어깨를 밀어주어 못이기는 척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다시 찾은 일자리는 중소기업이었다. 출근 시간은 두 배가 되었고 월급은 반이 되었다. 아이들과 있을 시간은 그나마도 줄었으며 업무량은 중소기업답게 이것저것 다 하는 멀티를 원해 더 늘었다.

그녀는 점점 모임에 나오지 못했고, 늘 공부 중이었으며, 뭔가 시도하고 있었다. 자신의 스펙을 더 높게 쌓고 자격증을 더 따서 자신이 원하고 도전할 만한 일을 하고 싶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지난 2여 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한국을 떠났다. 남편의 해외파견에 맞춰 두 아이를 데리고 따라나선 것이다. 아이들과 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고 다른 세상도 있다는 걸 보고 싶다고. 그리고 그동안 공부를 더 해서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도전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차라리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라는.

한국의 유리천장은 끝없이 그녀에게 도전을 안겨주었고 그 도전을 기꺼이 이겨낸 그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을 안겨주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끝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존경스러워졌다. 전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담담했으며 대한민국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이제 대한민국이 답할 때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좋은 엄마, 좋은 아내이길 포기하고 남성 동료들의 비웃음에도 기꺼이 웃어주며 쿨하게 받아줘야 하는 김 팀장의 서사가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가깝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좋은 엄마, 좋은 아내이길 포기하고 남성 동료들의 비웃음에도 기꺼이 웃어주며 쿨하게 받아줘야 하는 김 팀장의 서사가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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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끝내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지 않은 김 팀장이 생각난다. 김지영보다 김 팀장의 서사가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가깝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이길 포기하고 남성 동료들의 비웃음에도 기꺼이 웃어주며 쿨하게 받아줘야 하는 김 팀장의 현실은 82년생 김지영이 이를 악물고 다시 사회로 나온다면 여지없이 마주할 현실이다.

김 팀장에게도 자신의 여생을 바쳐 뒤를 봐주는 친정엄마가 계셨을까? 아니면 그녀는 무엇을 얼마만큼 포기하고 살아온 것일까? 그리고 우리 사회는 왜 김 팀장처럼 일하는 여성들에게 몰염치하게 일방적으로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는가.

그녀는 2년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때는 달라질까요?"

그녀가 물었다. 이제 대한민국이 답할 때이다. 저출산과 기존의 결혼제도와 가족제도에 대한 반기로 저항하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들에게 답을 해야 한다.

21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2016년 촛불항쟁의 마지막 고비는 아마 내년 총선에서 대한민국 국회를 얼마나 어떻게 바뀌느냐로 일단락될 것이다. 지난 시대의 대한민국의 묵은 적폐를 청산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성차별 적폐 또한 이제 곧 청산의 대상이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대한민국 성별 격차 문제 또한.

태그:#82년생 김지영, #유리천장, #성별격차, #서울여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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