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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은 세계여성의날이다. 1908년 미국의 섬유여성노동자들이 참정권과 임금인상, 인간다운 노동환경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를 기념해 세계여성의날이 제정되었다. 해마다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세계여성의날을 기해 시민으로서의 존중과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17년부터 해마다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요구하며 ‘3시STOP 조기퇴근시위’를 조직해 온 ‘3시STOP 공동행동’은 2020년을 맞아 ‘3시STOP 여성파업’으로 전환하였다. 코로나19 여파로 오프라인 파업대회는 취소되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개별파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내가 있는 노동현장에서의 성차별에 문제제기하고 목소리를 내는 일에 전세계 여성노동자들이 함께 연대할 것이다.

 ‘3시STOP 공동행동’은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분 설문조사 분석과 채용성차별, 최저임금, 직장문화, 페미니즘 사상검증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5편에 걸친 시리즈 기사로 구성했다. 이번 글은 성차별을 당연시하고, 성폭력을 은폐하는 직장문화에 대해 알렉스(별칭)가 작성했다.[편집자말]
  
모니터가 꺼진 노트북과 공책, 펜
 모니터가 꺼진 노트북과 공책, 펜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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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회장님 안녕하세요. 사원이 부회장님께 메일을 보내 많이 놀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부로 회사를 떠납니다. 제가 왜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는지 부회장님께서 아셔야 한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입사했을 당시, 모든 신입사원이 그렇듯 저는 긴장하면서도 이곳에서 시작할 회사생활에 대한 기대와 포부에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차장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에는 여자에게 불이익이 있어. 알고 시작해. 모르는 것보단 낫잖아?'

저는 이 한 마디에 지금까지 노력해온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보여주기도 전에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 제 잘못도 아닌, 그 누구에게 사과해야 할 것도 아닌 바로 제 성별 때문에 말입니다. 이후로 저는 직급을 막론하고 수많은 남직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매일같이 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원래 널 안 받으려고 했는데, 남자를 달라고 했는데 (여자인) 네가 왔어.'
'요즘 남자애들이 얼마나 공부를 못하면 여자를 뽑아?'
'우리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자가 되어야 해.'
'너는 결혼해서도 일 할 거니? 왜? 집에서 놀면 좋잖아.'
'나는 해외출장에 여자는 절대 안 데려갈 거야.'


'여자는 안 된다'는 말은 일부 남직원들이 성차별적인 편견에 기초해서 하는 말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단언컨대, 우리 회사는 여성 직원들이 동등하게 소속감을 느끼며 업무하고 인정받기 매우 어려운 형태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입사 후 1년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제가 겪은 사내 성희롱을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인사담당자는 한 달 넘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고, 다시 문제를 제기하자 같은 본부의 부장이 제게 성희롱 신고를 취하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 가해자를 전환배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끼는 후배인 가해자가 안타까워서 도와주고 싶고, 제가 신고를 취하하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다음 날 인사운영팀에 다시 한 번 성희롱 사건에 대해 고지하였고 그제야 가해자에 대한 미미한 징계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2018년 3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민주노총 전국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주최 측이 참가자들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미투 배지가 진열돼 있다.
▲ 지금은 우리가 함께해야 할 시간 "미투" 2018년 3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민주노총 전국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주최 측이 참가자들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미투 배지가 진열돼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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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소문을 들은 주변 남직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걔도 가장인데….."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없던 일로 치고 잘 지내보자."
"네가 예민한 거 아니야? 그냥 스친 거 아니야?"
"걔가 엘리트인데 그럴 리가 있냐?"
"걔 좋은 사람이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


가해자는 제게 분명히 성희롱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정작 인사팀과 주변 사람들에게는 '기억이 안 난다', '억울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변 남직원들은 철저하게 가해자의 앞날만 걱정해주었습니다.

아무도 제가 겪었을 수치심과 외로움,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고통에 대해서 묻지 않았습니다. 앞으로의 제 회사 생활과, 생계와, 삶에 대해서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는 그렇게 '재수 없게 예민한 여직원을 만난 불쌍한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성희롱을 당해도 문제제기를 했다가는 회사에서 그들을 바로 '잘라버리기' 때문에 말도 못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바로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젊은 여성 직원들입니다. 부회장님은 아시는지요? 비정규직 입사지원자들 사이에서 우리 그룹사 계열 입사 면접에서는 능력과 경력은 필요 없고 '예쁘면 된다'는 말이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얼마 전 있었던 일입니다. 손님이 와서 차를 접대해야 하는데 당시 비정규직 여성 직원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신입 남성 직원이 들어가자 다들 화들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부장은 앞으로는 남자는 절대 차 대접을 하지 말고, 새로 뽑을 비정규직 여성 직원에게 그 일을 맡기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저는 4급사원인데도 여러 번 그 일을 했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직원이 하는 순간 문제가 된 것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계약직 사원을 여성으로 한정하는 것은 남직원에게 그 '천한' 일을 시킬 수 없기 때문인가요. 차를 따르고 접대하고, 장을 보고, 탕비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돌리고, 남직원을 보조하는 역할은 꼭 여성이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여성만 뽑는 것인가요?

우리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여성 직원 수는 284명인데 저와 같이 정규직 여자 사원은 10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의 여성 직원들의 대다수는 고용이 불안정하거나 승진이 제한된 저임금의 직급인 것입니다.

이렇게 직급(계약직, 5급)과 성별(여성)을 일치시키는 것은, 성별에 의한 부당한 차별과 배제를 직급으로 은폐하고, 여성을 '무시해도 되는 직원'으로 보는 시선을 회사에 있는 모두가 공기처럼 받아들이게 합니다. 실제로 어느 남자 후배가 제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여자들이 권위가 좀 없지 않나요?'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우리 회사의 여자 직원이라면 모두가 공감할거라 확신합니다. 부회장님은 아시는지요. 여자 직원 3명 이상이 모이기만 하면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화가 바로 회사에서 겪은 성차별과 성희롱입니다. 눈물 나올 만큼 힘들지만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공유하며 서로 분노해주고 위로하며 버텨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여성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곳에서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에는 아직 희망을 갖고 변화를 일궈내고자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위해 이 글을 씁니다. 비록 저는 떠나지만 회사에서 희망과 목표를 갖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료들, 앞으로 우리 회사에 큰 꿈과 포부를 갖고 들어올 후배들을 위해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쓴 만큼, 그 변화를 만들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3시STOP 여성파업 기획연재]
① 여성노동자 74.0% 직장서 성차별 경험... 반말·성희롱·임금차별 등
② 저는 채용성차별에 맞선 아나운서입니다
③'이 업계에선', '원래 그런곳'...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마법의 말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20년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여성파업 대회를 준비하며 기획된 글로, 민우회 회원 알렉스(별칭)가 퇴사할 때 썼던 실제 편지내용을 요약·수정한 것임을 알립니다.


태그:#3시스탑, #여성파업, #성별임금격차_해소, #POWERUP,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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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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