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 어머니가 임신중절을 열 번도 넘게 하셨다네요. 기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임신중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한 지인이 한 말이다. 자리를 함께 한 모두 놀랐지만, 글쎄, 이게 지인 어머니에게만 일어난 일이었을까?

어릴 적 어렴풋한 기억에, 식구들 끼니 챙기는 걸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하시던 엄마가, 저녁을 못하시고 뜬금없이 자리보전하던 날이 몇 번 있었다. 딸아이를 출산하고 한참 후 엄마에게 육아의 시름을 늘어놓던 어느 날, 엄마는 부끄러울 일도 아닌데 민망해하시며 낙태의 경험을 고백했다. 넷이나 되는 아이들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더는 아이를 낳을 엄두가 나지 않아 여러 차례 낙태했노라고.

적잖이 충격이었고, 무엇보다 당신의 잘못도 아닌데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엄마가 가여웠다. 어찌 보면 한 번도 안전한 낙태가 역사에 존재하지 않은 이 나라에서, 그렇게 위험한 불법 임심 중절을 받고도, 지인의 어머니나 내 엄마나 살아남은 게 천운일지 모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여전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여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생명을 잃고 있다. 여성의 재생산은 여전히 권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안전한 의료조치가 부재한 환경에서 낙태와 출산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일치 결정을 내린 바 있지만, 이후 정부는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보장하기 위해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임신 14주 이내의 임신중지만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겠다는 대체입법 초안을 내놓으려 한다. 결국 전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낙태는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셈이다. 여성의 몸을 국가가 통제한다는 가부장의 신화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인가?

"나는 낙태했다"고 외친 343명의 프랑스 여성
 
낙태죄 완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이 28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주최로 열렸다.
 낙태죄 완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이 28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어제 아침 신문에 여성 100인이 '낙태죄' 전면 폐지를 촉구하는 선언을 신문 전면에 게재한 것을 보았다. "그 어떤 여성도 '낙태죄'로 처벌받지 않도록" 임신 중지를 '전면 비범죄화'하고 성과 재생산 권리를 보장하라는 선언이었다. 100명의 여성들이 실명은 물론 얼굴 사진까지 게재한 선언문을 보니 문득, 프랑스 '343인 선언'이 떠올랐다.

1971년 4월 5일 <누벨 옵세르바퇴르> 잡지에 이름을 대면 알 만한 20대에서 70대 여성 인사들이(시몬 드 보부아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카트린 드뇌브, 잔 모로 등) '나는 낙태했다'고 커밍아웃하며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선언했다. 물론 이들 모두 몹쓸 X년이라는 공개적이거나 개인적인 욕이 날아들 것을 모르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낙태의 당사자임을 과감하게 밝힌 이유는, 낙태가 자신들에게 실재 일어났던 사건인 것처럼, 과거에도 지금도 여성의 인생에 깊이 관여된 일이며 결코 소수의 개인적인 일이 아님을 천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피임까지도 불법이었으니 여성은 임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단이 전무했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여성은 인생의 위기에 직면하지만 남성은 그 어떤 영향도 책임도 받지 않는다. 오직 여성만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니 원하지 않는 임신을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은 불법 낙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이가 많건 적건, 계급이 높건 낮건, 어떤 여성도 임신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343 선언'이 적시했던 것이다.

아니 에르노가 말한 그 중대한 '사건'은 바로 낙태였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태라는 공포의 동심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20대에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에르노는 낙태를 하기 위해 매우 위험한 일련의 과정을 수행한다. 이 과정들은 기실 먼 과거부터 당시(1964년) 에르노가 실행에 옮길 때까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던 여성들이 때로 목숨을 걸고 감행해야 했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여자들이 질 속에 뜨개질바늘을 넣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에르노 역시 부모님 댁에서 뜨개바늘 한 짝을 가지고 와 "침대 위에 누워서 뜨개질바늘을 조심스럽게 성기 속에 밀어 넣었다. 자궁 경부를 찾지 못한 채 더듬었고, 고통을 느끼자마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력감에 절망했다." "임신 중절을 위해... 나는 일부러 조심성 없이 넘어진다. 어떻게든 뱃속의 태아가 포기해 주기를 바라면서, 온 힘을 다해 산꼭대기에 올라 몸에 충격을 가해보려고." "결국 나는 불법 임신 중절 시술사의 명함을 받게 되었고... 탐침관을 넣어 임신 중절을 하는 방식이었다."

에르노가 행한 이 낙태의 과정은 섬뜩하지만,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거나 들은 방법들이다. 이름도 모르는 독초를 끓여 먹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곤 했다는 한국 여성의 낙태 수난사가 전설처럼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낙태로 고민하는 18세기 여성의 모습이 나온다. 몇 달째 생리가 없자 하녀 소피는 낙태를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낙태 시술자를 찾아가 위험한 시술을 받기에 이른다. 고통스러운 낙태의 과정을 함께 하는 주인공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역시, 소피의 경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삶이기에 몹시 괴롭다. 고통으로 얼룩진 낙태의 과정을 그림으로 남기려는 엘로이즈의 심경은, "수많은 여성들이 새겨놓은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여자의 고통을 그림으로 증거하려 했던 것이다.

에르노의 낙태 관통기인 <사건>에는 그녀의 임신에 공여한 남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임신에 깊이 관여했지만, 이로 인해 크나큰 변화나 불이익 또는 시련을 겪어야 하는 주체는 임신에 가담한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몸에 이토록 선명한 상흔을 남기고도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건이 임신 말고 또 있을까?

에르노가 낙태로 피를 말리는 동안, 그녀의 임신에 공여한 어떤 남자는 전혀 미안하지도 괴롭지도 않다. 오직 그 여자의 개인적인 일로 미룰 수 있기에 가능했던 무책임이다. 이 한가로워도 되는 몰염치가 임신(재생산)에 작동하는 남성의 권력이며, '낙태죄'의 당연한 공범이면서 그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지속적으로 생성해낼 수 있기에, 낙태는 오직 여성의 죄여야만 했다.

에르노가 20대에 낙태를 위해 벌였던 전 과정을 <사건>에 담고 펴낸 시기가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환갑의 나이였다는 것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왜 이 과정을 다시 복기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녀에게 '낙태'처럼 여자이기에 겪어야만 했던 경험을 쓰는 일은, "특정 개인의 자전적 성격에서 벗어나 집단적 자아가 대필한 사회학적 자서전"이기 때문이며, 몸에 새겨진 낙태의 기억이란 시간이 흘러도 쉬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기 때문이다.

의료의 합법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낙태의 경험은 여성에게 "혐오감과 구토감, 환멸, 다시 혐오, 자괴, 고통, 이른바 '정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감각, 자신이 이전과는 절대 같을 수 없다는 진실, 특히 이전의 육체를 잃어버렸다는 깨달음..."을 각인시킨다. 원하는 임신이 아닌 한 모든 임신은 여성에게 과중한 스트레스를 준다. 때로 일상을 중지시키고 중요한 기회를 포기하게 하고 인생에 좌절을 안기기에 그렇다.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 결정하고 낙태를 하는 순간조차도 여성은 모호한 죄의식에서도 자유롭기 어렵다. 낙태가 죄라고 믿어지는 한, 여성의 포궁이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다루어지는 한, 여성의 몸은 가부장의 망령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40년 전 프랑스의 '343 선언'이 천명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지금 여기 여전히 유효하다. 해서 다시 한번 외친다. 낙태죄를 완전 폐지하라.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합니다.


태그:#낙태죄, #임신중지, #343 선언, #에니 아르노, #<사건>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